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쿠투조프 (문단 편집) === 나폴레옹 전쟁 초기, 그리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전 === 1805년 쿠투조프는 [[빈(오스트리아)|빈]]으로 진격하는 나폴레옹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있기 전날 밤, 전황이 이미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쿠투조프는 동맹군 장군들을 설득하여 전투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알렉산드르 1세에게 까이게 되자 삐져서 병을 핑계로 전술을 짜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전투에 참여한 오스트리아군 장군 베이로데르(Feldzeugmeister Weyrother)는 훗날 이 전투에서 패한 것은 쿠투조프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동맹군은 나폴레옹에게 제대로 발렸고, 알렉산드르 1세는 그제서야 쿠투조프를 신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막판 빠른 후퇴를 위해 전장에서 지휘를 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1806년~ 1812년 동안 쿠투조프는 리투아니아와 [[키이우|키예프]]의 군정관을 역임했다. 쿠투조프는 1806년~ 1812년에 재차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s-10|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작전을 총지휘했다. 쿠투조프는 다가올 [[프랑스군]]과의 싸움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재빠른 작전을 실시하여 또 다시 오스만군을 갈아버렸다. 그 후 부쿠레슈티 조약에서 그동안 열심히 털어온 땅들 일부를 돌려주고 달랬다. 그리고 [[베사라비아]](Bessarabia) 점유를 공식화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쿠투조프는 [[공작(작위)|공작]]([[프린스|knyaz]])이 되었다 이 때는 프랑스는 러시아 황제의 외삼촌[* 황태후 오빠이며 이종사촌인 그 후계자는 나폴레옹이 눈독 들이던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과 결혼함.]이 다스리던 [[올덴부르크 대공국]]을 합병하고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탈퇴하는 등 서로 열심히 어그로를 쌓던 시점이며, 불과 1개월 후 프랑스의 러시아 공격이 시작된다. 프랑스와의 관계가 파탄나고 전쟁이 가시화되니 양면 전선을 막기 위해 좀 더 양보해서라도 오스만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관계를 풀어둘 필요가 있었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오스만은 프랑스와 전쟁 중인 러시아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다.[* 만약 오스만이 러시아를 공격했다면 러시아로서도 최악의 위기를 맞이할뻔 했지만 오스만 역시 러시아가 전력을 다해 저항할 경우 안 그래도 러시아에게 군사력이 밀리는 자신들의 피해가 더욱 막대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스만은 굳이 큰 희생없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마무리지으려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